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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방스와 마티스 2 : “색채는 다이너마이트다” 사실 마티스는 스무 살이 넘도록 자신의 예술가적 자질을 깨닫지 못했다. 청년이 될 때까지 그는 어떤 형태의 예술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인생 진로를 전격적으로 바꾸어 놓는 어떤 계시를 만나게 된다. 1952년 11월 8일 마티스는 출생지 르 카토 캉브레시(
- 프로방스와 피카소 1 : 스페인 촌놈, 파리에 정착하다 피카소의 이름은 원래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치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즈 이 피카소(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
- 프로방스와 마티스 7 : 재즈, 재즈, 재즈 『재즈(Jazz)』는 1947년 파리에서 테리아데(Teriade) 출판사에 의해 42×32.5cm의 큰 폴리오(folio) 볼륨으로 출판되었다. 20개의 컬러 지면은 마티스의 구아슈 컷 아웃 작품 170장이 스텐실로 인쇄됐고, 마티스가 사용한 것과 같은 리넬(Linel) 잉크를 사용했다
- 프로방스와 피카소 5 : 마티스 그림과 기법을 차용한 피카소 ❶ 피카소는 그의 두 번째 여인인 에바 구엘(Eva Gouel, 1885-1915)이 폐렴으로 죽어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끔찍한 대학살에 빠져 있는 동안 《할레퀸(Harlequin)》을 그렸다. 이 그림은 비극적이며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이다. 《할레퀸》은 즉흥희곡의
- 프로방스와 마티스 3 : 고요하고 평화로운 광선을 찾아서 마티스는 오랫동안 화실 안에서의 빈틈없는 작업에 지쳐서 파리를 떠나 다시 한 번 자연과 순수한 광선을 접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꼈다. 무엇보다 파리의 햇볕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광선’이 아니었다. 그러던 1917년 그는 기관지염에 걸려서 온화한 기후를 찾아 니스
- 프로방스와 마티스 0 : 마티스는 왜 프로방스에 정착했나 “뜨거운 태양은 빛나며, 내 침실의 창문은 활짝 열려져 있다. 그리고 나의 영혼도 함께 열렸다.” 이 말은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 1860-1904)가 프랑스 니스(Nice)에 왔을 때 남긴 말이다. 그렇다. 겨우 마흔 네 살의 나이에 사망한
- 프로방스와 마티스 1 : 마티스는 ‘노트르담 성당의 화가’였다 2019년 4월 15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비극적인 대화재로 인해 시테(Cité) 섬의 우아한 풍경은 사라졌다. 예전처럼, 앙리 마티스가 그렸던 그림처럼 온전한 시테 섬의 노트르담 성당을 보려면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은 기다려야 할 터이다. 파리의 화가들 가운데 노트르담 성당을 제일
- 프로방스와 피카소 2 : 자신보다 12살 많은 경쟁자 마티스를 만나다 피카소가 파리에 정착한 초기, 마티스는 세느 강 남쪽 생 미셀 가에, 피카소는 세느 강 북쪽 몽마르트에서 살았다. 피카소는 바토 라부아르(bateau-lavoir, 세탁선)로 불리던 낡고 허름한 낡고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첫 번째 여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
- 프로방스와 피카소 6 : 말년의 피카소는 왜 갑자기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1900년대 초 피카소의 작풍은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아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 그의 대표작《아비뇽의 처녀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도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 분석’이 비로소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 1882-1963)와 알게
- 프로방스와 피카소 3 : 피카소, 맞교환한 마티스 그림에 다트 던지며 조롱하다 피카소는 스타인 가문의 만찬을 싫어했다. 그는 불어가 유창하지 않다는 점을 매우 의식해서 침묵을 지켰다. 당시 그의 애인이었던 올리비에에 따르면 만찬 자리에서의 피카소는 “볼멘 얼굴로 뾰로통하게 있으면서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짜증을 내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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