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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펴는 데 오래 걸렸다 손을 펴는 데 오래 걸렸다 서인석 떠나는 사람의 소매를 끝난 일의 마지막 말을 남보다 조금 높아 보이던 자리와 내가 옳았다는 표정을 나는 오래 붙잡고 있었다 손안에서 빠져나간 뒤에도 아래 손을 펼쳤다 물은 잠시 고였다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가벼웠다 나는 비로소 그 손으로 물을 떠 오래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 얼굴을 씻었다 — 서인석
- 비밀번호는 문만 열었다 비밀번호는 문만 열었다 서인석 현관문에 번호를 달고 열쇠를 버렸다 쌀도 국도 손가락 몇 번이면 왔고 안부는 엄지 하나로 끝냈다 멀리 사는 친구의 부고에는 검은 봉투 대신 계좌번호를 문 앞에 밥이 놓였다 식탁에는 한 사람 몫의 김만 올랐고 문밖에서는 누구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비밀번호는 내가 사는 집을 열었지만 사람이 들어오는 방법까지 알지는 못했다 — 서인석
- 아무거나 아무거나 서인석 무엇을 먹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늘 아무거나라고 했다 맵지 않은 것 냄새가 세지 않은 것 누구도 싫다고 하지 않을 것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편한 쪽을 골랐다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 식당에 들어가 메뉴판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내가 좋아하던 매운 김치찌개를 주문했다 첫 숟갈에 땀이 났다 나는 천천히 내 앞의 한 그릇을 다 먹었다 — 서인석
- 아무도 다급히 부르지 않던 날 아무도 다급히 부르지 않던 날 서인석 아침에 놓아둔 열쇠가 저녁에도 그 자리에 있었고 신호등은 몇 번 늦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국이 식기 전에 밥을 먹었고 깨진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지 않았고 나는 별일 없었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런 날이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다 지금은 안다 무사히 저녁까지 온 하루가 얼마나 조용한 행운이었는지 — 서인석
- 먼저 웃어준 사람 먼저 웃어준 사람 서인석 누가 사진을 찍자고 했다 나는 입술을 양쪽으로 조금 밀었다 카메라 속 얼굴은 웃는 모양만 하고 있었다 그때 옆에 선 사람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돌아보자 그 사람이 먼저 웃었다 나는 따라 웃으려다가 그만 진짜로 웃고 말았다 오래 닫아두었던 얼굴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진 속에는 그 사람보다 내가 더 크게 웃고 있었다 — 서인석
- 아직 묻어나는 색 아직 묻어나는 색 서인석 책장 맨 아래에서 모서리가 닳은 스케치북을 꺼냈다 노란 크레용으로 그린 해는 지붕보다 크게 떠 있었고 한쪽으로 기운 나무 아래 팔이 유난히 긴 아이가 서 있었다 마른 줄 알았던 노란색이 엄지 끝에 묻어났다 나는 다음 장을 넘기지 못하고 손가락을 몇 번 비벼보았다 지워질 듯하다가 다시 선명해지는 색 그날 밤 스케치북을 서랍에 넣지 않았다 — 서인석
- 어설퍼서 더 그리운 어설퍼서 더 그리운 서인석 사랑도 싸움도 꿈도 모든 것이 서툴렀지 그래서 더 뜨거웠고 그래서 더 아팠던 그 시절 어설퍼서 더 그리운 그때의 나를 가만히 품어본다 무엇 하나 잘하지는 못했어도 모든 순간에 정말 진심이었던 나 — 서인석 시를 쓰고 나서 젊은 날에는 사랑하는 일도, 다투고 화해하는 일도, 꿈을 향해 달려가는 일도 모두 서툴렀습니다.
- 혼자서도 괜찮았던 날들 혼자서도 괜찮았던 날들 서인석 친구가 멀어져도 사랑이 끝나도 이상하게 덤덤했던 그 시절의 나 혼자서도 괜찮았던 날들 가진 것은 많지 않아도 세상을 다 가진 듯한 마음이었지 누군가 곁에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쓸쓸히 걷는 길마저 내 길이라 믿었지 그 외로움마저 자유라 부르던 때 혼자였지만 외롭지만은 않았던 날들 — 서인석 시를 쓰고 나서 젊은 날에는 사람이
- 우리가 빛나던 순간 우리가 빛나던 순간 서인석 서툴고 어설펐지만 그때의 우리는 빛나고 있었지 말보다 먼저 서로를 향해 뛰던 마음 그게 우리의 청춘이었어 우리가 빛나던 그 순간은 지금도 가슴 깊은 곳에 살아 있어 시간은 멀리 흘러갔지만 지나간 기억 속에는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우리 둘 — 서인석 시를 쓰고 나서 젊은 날의 사랑은 서툴고 어설펐습니다.
- 내일도 혼술일까 내일도 혼술일까 서인석 라면 물을 올려놓고 잔 하나를 꺼냈다 어제 씻어 엎어둔 바로 그 잔이다 달력은 하루를 넘겼지만 식탁은 어제와 같고 전화기는 밤새 검은 얼굴로 누워 있다 나는 아니라 앉을 사람이 없어 다시 넣었다 기억해주는 사람보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더 그리운 저녁 물이 끓는다 오늘도 혼자 잔을 채운다 내일은 잔보다 먼저 초인종이 울렸으면 좋겠다 — 서인석